디자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생산물의 시각적 요소를 꾸미는 일이라면
오늘과 같은 세상에서
당연히 자본에 봉사하는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디자인이 어떤 생산물의 내용과 본질을 조직화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그 생산물의 존재적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그 생산물에 담긴 자본의 욕망을 정화하는 것일 수 있다.
디자인은 산업적 개념이 아니라 생태적 개념이다.
말하자면 디자인은 나무나 돌이나 풀이나 이끼일 수 있다.
그래서 디자인은 인간을 끝없는 욕망 기계로 만드는 자본에
균열을 일으킈는 어떤 무기일 수 있다.
_김규항, 《DESIGN》2009년 12월호 중에서
사회적 모순이 존재하는 한,
다들 세상이 좋아지고 달라졌다고 해도
어느 한 귀퉁이엔가 인간으로서 위엄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예수를 쫓는 사람은 지배체제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수가 살던 세상처럼 지배체제와 불화했다고 해서
쉽게 죽임을 당하는 세상은 아니다.
그러나 지배체제의 직간접적 탄압과 주류 사회에서의 배제,
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오해와 곤경은 다르지 않다.
지배체제와 불화하지 않으면서,
아무런 오해와 곤경에 처하지 않으면서,
이쪽에서도 칭찬받고 저쪽에서도 존경받으면서,
예수를 좇고 있다 말하는 건 가소로운 일이다.
_김규항, <예수전> 중에서
비폭력주의는 오로지 폭력의 현장에서만 주장될 수 있다.
...
비폭력주의의 목표는
'비폭력'이 아니라 '저항'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
진정한 비폭력주의자들이 결국 폭력에 희생당하는 운명을 갖는 건,
지배체제가 그들에게서 무장투쟁을 선택한 운동가들보다
오히려 더 큰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_김규항, <예수전> 중에서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지금 내 삶을 지배하는 온갖 부질없는 집착과 욕망들을 씻어내고
내 본디 모습으로, 하느님의 모습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돈이나 권력, 명예나 세속적인 성공 따위에 대한 사랑을
나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하는 삶을 끝내고
나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이다.
...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예수의 말 그대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을 경계 지어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의 경계를 없애는 데서 가능해지는 일이다.
내 것의 일부를 이웃에게 주는 게 아니라
'내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_김규항, <예수전> 중에서
하느님 앞에서 빈부 격차는 그 자체로 악이다.
그런데 빈부 격차란 왜 생기는가?
고루 나눠 갖지 않기 때문에, 남들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 때문에 생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부는 능력과 노력의 결과인가
정당한 방법으로 쌓은 것인가와 상관없이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부끄러운 것이다.
부자들의 재산은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라 탐욕의 결과일 뿐이다.
하느님은 그들이 재산을 모두 나누어 자발적으로 가난해지지 않는 한
하느님 나라에 들이시지 않는다.
제자들의 반응에서 보듯 예수 당시에도
부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부가 하느님의 축복이라면 가난은 하느님의 저주가 된다.
...
그런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가난은 단지 불편한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게 된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으로 겪는 불편함에 더해
인간으로 무시당하고 차별받아야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 저주를 뒤집는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저주가 만연한 세상을 향해
'부자는 절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한다.
_김규항, <예수전> 중에서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이지 않을 수 없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이지 않을 수 없다.
기도든 명상이든,
하루에 30분도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않는 혁명가가 만들 새로운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제 심리적 평온뿐이다.
_김규항, <예수전> 중에서
"어느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실상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편을 사랑하거나
한편을 존경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마몬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마태 6:24
"마몬"은 아람어로 '물질적인 부'를 뜻한다.
...
마몬은 사람을 직접 해치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조금씩 물질적인 욕망을 심어 줌으로써,
행복의 기준을 돈과 물질로 천천히 바꾸어 버림으로써
스스로를 해치게 만든다.
...
자본주의라는, 예수도 상상하기 어려웠을
'공식적인 마몬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돈과 물질에 대한 예수의 말을
더 단호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중립적인 상태에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마몬의 체제에 깊이 사로잡혀 있으며,
애써 빠져나가려 하지 않는 한
매우 자연스럽게 마몬의 종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
우리는 마몬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단지
'현실적인 것'으로 느끼는 것이다.
_김규항, <예수전> 중에서
어떤 게 더 큰 이적인가?
사람이 물 위를 걷는 것,
그리고 남보다 더 많이 가진 걸 자랑스러워하던 사람이
그것을 부끄럽고 불편해하게 되는 것.
예수는 진정한 이적, 더 큰 이적을 요구한다.
_김규항, <예수전> 중에서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아도,
심지어 교회와 교리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지만,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제아무리 성실하고 충성스럽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_김규항, <예수전> 중에서
김규항 지음 / 돌베게
디오티마 인욱이를 통해서 고래가그랬어와
규항님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어느덧 나는 고래삼촌과 고래동무가 되었고
디오티마는 규항님이 예수전을 저술중이라고 했다.
그것이 벌써 몇해 전 일이다.
출간소식을 듣게 된 것은 마일토벽 작업을 함께 하는
미소친구를 통해서다.
안상수씨가 디자인한 노오란 양장책을 손에 든 미소친구는
책을 미쳐 다 읽진 못했지만 감격에 겨웠던지
예수전을 통해 만난 예수에 대해 느낀점을 나누었다.
지금 현재 나의 삶은 진리를 따라 산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나'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예수전을 읽으며 적극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는 삶에 대해 다시금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만들고 에너지를 내어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다가가야 겠다.
짧은 나눔이었지만 미소친구의 나눔은
내 안의 울림이 되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열심히 사회에 대해서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던 지난 무지의 날들보다는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나는 내가 발딛고 있는 현실에서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
머리만 커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좀 알았다고 젠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도 곧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자가 될 수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예수의 가르침과 삶의 숨결을 내면 깊숙히 불어 넣어야 한다.
예수전이 궁금하다.
얼른 예수전을 구입해야겠다.
_뱅글벙글